합기도의 역사적 배경 합기도 역사적 정립의 올바른 방향 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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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2-03-28 15:11 조회 163 댓글 0본문
합기도의 연대기별 근대사 구분 및 분석 비판: 합기도의 형성기(1945년-1969년)
▲ 이호철 박사 무예신문 기사입력 2015/08/09 [00:16]
합기도의 광복이후 지난 70년 동안의 근대사는 한 인간의 흥망성쇠의 과정과 같이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 왔다.
태권도가 한국의 대표무예로 정착될 때까지는, ‘코리아 가라데’의 오명을 벗는데 각고(刻苦)의 노력과 시간이 걸렸던 것처럼, 합기도 또한 단체난립과 기술체계의 미정립 및 무명(武名) 논란 등의 부정적인 문제점들이 생겨났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단 한번도 ‘코리아 아이기도’라는 무명을 국내외적으로 사용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왜색(倭色) 무예로서의 콤플렉스에 시달리지도 않았다.
차별화된 훌륭한 합기도의 한국적인 호신 술기들이 발달되고 진화해 오면서 명실상부한 한국의 신체문화가 녹아 있는 근대무예로서 국내외적으로 발전되어 왔던 긍정적인 합기도의 흐름을 우리는 간과(看過)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합기도 무명의 개명(改名)의 불필요성에 대한 당위성(當爲性)을 논리적으로 전개해 나가기 전에, 더 설득력 있고 실증적인 주장을 위해 필자가 절실히 깨달은 것은 해방 이후에 합기도가 어떻게 형성되고 발전해 왔는가에 대한 역사적인 설명의 필요성이다.
합기도의 수련경험의 유무를 떠나 합기도의 올바른 역사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독자들을 위하여 합기도의 연대기별에 의한 근대사적 사실들을 알리고 분석적인 비판과 함께 병행되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이러한 취지에서 합기도 근대사를 연대기별로 나누어서 설명하고자 한다.
1945년 이후 현대 한국합기도의 역사 구분은 60년대 말까지를 합기도의 형성기, 70년대부터 90년대 초까지를 합기도의 발전기, 1990년대부터 2009년까지는 합기도의 확장기, 그리고 2010년 이후부터는 합기도의 정체기로 필자는 구분하고자 한다.
이러한 합기도의 연대기적인 근대 역사의 구분이 향후 후학들이 합기도의 역사를 재정립을 위해 근대역사의 기틀을 만들어가는 작업에 미미(微微)하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1) 합기도의 형성기(1945-1969)
1) 일본식 근대무예의 한국 유입과정
한국에 근대식 무예의 도입은 근대화 초기시기인 개화기에 시작되었다. 일본은 구한말기에 조선에 현대식 군대와 경찰 시스템을 보급한다는 명목 하에서 일본식 격검(검도)과 유술이 유입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무도관이 설립되고 군사훈련용 무도교육이 실시되면서 경기화도 이루어지면서 무도단체가 결성되었다. 공수도, 유도, 검도 등과 같은 근대식 일본무도의 도입은 자발적으로 필요성에 의한 국가간의 교류(交流)가 아닌 일방적(一方的)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일본 정부에 의해서 반강제적인 과정은 일본 무도 문화가 우수하다는 명분으로 한국 침략을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었던 시대적 상황이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런데 그 후에 이러한 근대식 일본무도들이 일본에 유학을 갔던 한국 학생들에 의해서도 한국에 유입되기 시작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일본무도의 한국 유입이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를 위한 강제식 유입과 함께 일본유학생들에 의해서도 자발적으로 유입되었다는 점이다.
한일합방 후에 귀국한 일본 유학생들은 한국사회의 신지식인으로 개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유학시절에 그들이 수련한 일본식 유술 및 검술, 공수도, 당수도 등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일본유학생들의 긍정적인 역할은 부분적으로나마 국력 신장과 국권수호를 위해서 교육기관에 유술 및 검술과를 설치하여 교육을 실시하는 노력을 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친일의식으로 무장된 일부의 일본유학생들에 의해서 일제교육의 일환으로 사용되어지는 면도 적지 않았다. 하여튼 사회적으로 일본무도에 관심이 확대되면서 일반인들도 일본식 근대무도를 대중적으로 수련하기 시작했다.
광복초기에는 일제시대의 일본식 무도종목들이 여전히 학교 및 군대에서 경찰교육을 위한 무예로 장려되었다. 특히 대한체육회의 조직이 결성되기 시작하면서, 무예단체는 대한체육회의 산하단체로 가맹되었고, 무예의 스포츠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합기도의 역사적 정체성이 일본무도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이유는, 해방 직후에 일본무도의 문화가 합기도 발전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일본 문화가 강제적으로 주입되었던 시기로부터 한국 무예가 어떤 것이든 일본적인 색깔을 금방 벗었을 수 없는 상황적인 불가피성이 있었다.
이는 향후 합기도가 일본 아이기도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잘못된 인식을 만연(蔓延)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어서, 특히 체육계 지도자들이나 무예를 연구하는 학자들조차 합기도의 원형은 일본 아이기도라고 하는 어처구니없는 주장들이 난무(亂舞)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탈일본화를 위한 한국의 무예의 정립을 위한 본격적인 노력을 위한 움직임이 일어나기도 전에 6·25의 한국내전으로 인해서 혼란한 한국 사회에서 자체적인 무예문화의 정립의 기회를 상실하는 아픔을 겪었다. 전란(戰亂) 후에는 무예단체의 융합(融合)과 분화(分化)가 반복되는 과정을 겪었다.
가령 일본무도의 정체성이 확실한 유도나 검도와는 달리 태권도는 기존의 당수도와 일본의 공수도가 결합된 태수도에서 태권도로 통합되는 과정을 겪었고, 합기도는 대한기도회 등을 시작으로 다양한 합기도단체가 생겨나가 시작했다.
무예문화의 교류의 핵심은 무예경기가 스포츠를 지향함에 따라 그 기속화가 이루어졌다. 국내는 대한체육회가 주관하는 전국체육대회의 종목으로 채택되어 무예가 한국 사회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개화기에 일본의 근대식 무도의 위로부터 아래로부터의 도입방식은 시작부터가 잘못되었다. 무예인들간의 상호교류의 성격을 지닌 민간교류에 의한 전통무예의 조화 및 동화로써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일본 제국주의적 통치의 야심에 의한 반강제적 군사교육목적으로 또는 친일의식을 지닌 유학생들에 의한 일본의 근대무도의 유입은 특히 한일합방 후 일제 식민지시기를 거치면서 바람직한 한국식 근대무예의 형성과 토착화(土着化)는 불가능해졌다.
가라데, 유도, 검도와 같은 일본 근대식 무도가 무차별적으로 수용돼 식민지교육의 일환으로 사용되어지는 중 갑작스럽게 타의에 의해 광복을 맞은 상황에서, 합기도 또한 일본에서 대동합기유술을 수련한 최용술과 장인목 등에 의해서 도장에서 시작되었기에 국가적인 정책이나 방향의 도움 없이는 일본무도의 색깔에서 탈피한 한국식 무예로서의 합기도는 한계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2) 합기도는 최용술의 제자들에 의해서 관(도장)에서 협회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해 가다
합기도의 근대무예로서의 형성은 최용술에 의해 시작되었음을 전제로 시작한다. 일본에서 대동류유술을 수련한 최용술은 광복 후 1946년에 귀국하여 대구에서 서복섭과 1951년도에 처음으로 대한합기유권술 도장을 개관했다. 영남대 법학도였던 서복섭이 최용술의 첫 제자로 1959년에 최용술로부터 독립하여 서울 낙원동에 도장을 운영하면서 체육과 대학교수로도 후진 양성을 하는 역할을 했다.
그 후에 최용술의 제자인 지한재는 1955년 경북안동에 합기도장을 열었고(합기도 명칭 최초 사용), 2년 후인 1957년에 서울에 성무관을 창관했다. 이 시기에는 최용술은 합기도란 용어를 쓰지 않고 야와라, 유술, 합기술 등의 명칭을 혼용하여 사용했다. 기술 또한 적은 움직임의 동작에 의한 회전법과 직선법을 사용하는 관절기 위주의 실전적 술기 위주로 수련하였다.
지한재는 일본유술 지향적인 합기도를 한국식 합기도로 탈바꿈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특히 유술적 특성이 강한 합기도에 족술(발차기)을 접목시켰다. 따라서 1960년대부터는 발차기, 낙법, 각종 세분화된 종류의 술기들이 수련되어지는 모습을 갖추면서 기존의 일본식 무도와는 차별화되어 가는 모습을 띠기 시작한 동시에 합기도의 기본 수련체계인 낙법, 발차기, 술기의 수련구분이 형성되었다.
▲ 한국 합기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최용술과 지한재. 일본에서 대동류유술을 수련한 최용술은 광복 후 1946년에 귀국하여 대구에서 서복섭과 1951년도에 처음으로 대한합기유권술 도장을 개관했다. 최용술의 제자인 지한재는 1955년 경북안동에 합기도장을 열었고(합기도 명칭 최초 사용), 2년 후인 1957년에 서울에 성무관을 창관했다. ? 한국무예신문
‘합기도’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지한재가 1955년 안동에서 도장을 열면서부터였고,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1957년 서울에 창관한 성무관 이후부터였다. 이는 최용술의 첫 제자인 서복섭이 대동류합기권유술에서 ‘유권술(柔拳術)’이라고 명칭을 제정했다가 다시 ‘합기유권술(合氣柔拳術)’로 바꾸어 사용하는 것에 착안해서 지한재가 합기도로 명명(命名)하였다고 회고록에서 언급하고 있다. 이는 대동류유술을 배운 우에시바 모리헤이가 대동류합기유술에서 아이기도라는 무명이 만들어졌던 것과 같은 맥락으로 ‘합기도’가 ‘아이기도’의 이름을 차용하였다는 사실과는 전혀 무관(無關)함을 알 수 있다.
1961년 대한민국합기도협회가 처음으로 창단되었다. 그 산하로 1961년 8월 10일 김무홍에 의해 신무관이 개관됐다. 도장수가 늘어나면서 난립되어가는 합기도 계열들을 통합하고자 최용술을 중심으로 서복섭, 김정윤, 지한재 등이 1963년에 최초로 문교부에 인가를 받아 사단법인 대한기도회가 창립되었다.
그러나 통합의 노력이 서로의 이해관계로 무산되고, 1968년 4월에 지한재를 총관장으로 하는 대한합기도협회가 결성됐었고, 1968년 5월에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이는 국가적 차원에서 합기도의 통합의 필요성을 모색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 시기에 합기도라는 용어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던 최용술도 합기도라는 명칭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하지만 결국 합기도의 통합시도는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오히려 또 하나의 합기도 단체가 인천지역을 중심으로 명재남에 의해서 국제연맹합기회(재남무술원)가 창설되어 더 분열의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3) 형성기의 문제점들과 아쉬운 점들
한 무예의 초기의 지도방식과 수련체계는 그 무예의 전승과 발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가령 유도나 가라데와 같은 일본무도의 초기의 도장의 대부분 수련방식은 한 명의 사범이 다수의 수련생들을 대상으로 직접교수법에 따라 사범의 시범을 모방(模倣)하고 반복(反復)하는 상대방과의 공방형식으로 수련하는 것이었다. 일본의 아이기도도 예외 없이 이러한 도장문화의 수련이 행하여졌다.
그런데 합기도의 초기 수련은 최용술은 영세한 좁은 도장에서 소수의 제자들을 상대로 개인 지도식 술기 전수방식으로 학생들의 특성이나 상황에 따라 지도하였기에 통일된 시스템에 따른 도장문화 수련방식이 아니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용술의 합기도 기술지도에 체계가 없었다는 사실은, 그의 제자였던 유병돈의 진술(陳述)에서 잘 나타난다.
“최용술 선생님은 체계를 갖추고 지도를 하실 수 있는 분은 아니었고, 기분이 내키는 대로 그 때 그 때 기술을 가르치신 것으로 보아 도장문화의 수련을 하시지는 않으셨던 것 같다.”
이는 곧 제자들마다 공통적이 아닌 다른 낱술기들을 지도하였고, 타 무도와 같이 수준에 따라서 수련해야하는 통일된 형(품세)이 부재했다는 것이다. 향후 이는 합기도의 통일된 술기체계를 갖지 못하는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최용술의 제자들 특성에 따른 지도방식은 제자들의 합기도 기량(技倆)의 향상에 큰 역할을 하였지만, 독립한 제자들이 도장을 차려 지도할 때에는 도장마다 술기 수련의 형태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통일된 술기체계에 따른 심사제도가 없었기에 사범의 임의 판단에 의해서 급이나 단을 주는 개별적인 형태는 도장의 수(數)와 수련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문제가 되었다. 그에 따라 심사의 통합성과 규칙을 제정하기 위한 협회가 창립되어져 갔지만, 통합된 하나의 협회가 아닌 수련스타일과 기술체계가 상이한 도장들로 이루어진 협회들도 난립하게 되고 말았다.
경기화된 무예는 규정된 경기 규칙에 맞추어 훈련하기에 경기시합에서 쓰일 수 있는 기술들 중심으로 수련체계가 이루어지는 이유로 기술들의 통합이나 정리가 자연스럽게 되어간다. 오늘날 스포츠무예가 된 태권도, 유도, 검도 등은 경기화를 통해 기술적인 통합이나 체계가 이루어진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합기도는 경기화 되지 않고 전통적인 수련방식에 의존(依存)하였다. 일정한 기준이나 규칙에 따른 통합된 기술체계가 없다는 의미는 임의적인 호신술기들이 검증 없이 우후죽순처럼 만들어지고 수련되면서 합기도의 술기가 무려 3,000여 수(手)를 넘는 양적인 팽창을 초래하였다.
이는 곧 실용적이고 효율적인 술기들의 수련의 효과가 상쇄(相殺)되는, 질적 하락의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였다. 특히 시합이나 경기화하지 않고 전통적인 수련방식을 고수(固守)한다는 명분(名分)하에 이러한 통합성과 체계성이 부족한 합기도 술기에 대한 고질적인 문제의 발단이 합기도의 형성기부터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다.
최용술이 합기도를 보급하던 시기에 태권도의 최홍희 장군처럼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위치 즉 군인장교나 민족지도자 또는 교육자의 직위에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도 든다.
가령 최홍희는 회고록에서 태권도란 무명으로 통일하는 과정에서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공수, 당수는 일본말로 가라데인데, 이 좌석에서 가라데를 고집해야 할 사람은 바로 나요. 나는 일제 시대 가라데를 배웠으며 (…) 우리가 해방되었고 또 우리 민족무도를 만들자는 뜻에서 가라데를 버리자는 것인데 해방 후에 배운 당신들이 무엇 때문에 가라데를 고집하는 거요?라고 언성을 높이며 강력히 주장한 것에 대해 모두들 아무 반박도 못하고 “그러면 태권도로 합시다” 하고 동의했다는 사실이나 자신이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이 되고, ‘태권도’가 협회 명칭으로 된 것은 그 당시에 도장(관) 관장들은 그의 육군 소장이라는 권위가 있었기에 순순히 응했다”고 술회(述懷)하고 있다.
비록 최용술이 뛰어난 합기도 술기와 카리스마적인 지도스타일로 근대합기도를 형성한 우수한 제자들을 많이 양성하였지만, 개인적인 도장에서의 사제관계로 끝나고 세력이 커 갈수록 그들을 한 곳으로 모으고 지도할 수 있는 경제적 또는 사회적 위치가 미미(微微)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유도를 일본의 국기화 시킨 가노지고로는 동경대학의 교수였으며, 태권도도 최홍희의 군대의 장군급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기에 한국의 국기(國技)로 탄생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절감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강력한 통치력을 지닌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한 이유는, 최용술이 해방 직전까지는 독립운동을 했던 민족투사나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지도자의 위치가 아니었고, 일본에 거주하면서 일본무도를 배웠다는 그 당시로는 취약점이 있는 한계성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최용술은 제자들에게 합기도 술기를 가르치는데 열중하였으나, 지도하는 무예에 대한 철학이나 사상과 같은 이론적인 지도, 특히 한국무예로서의 기틀이 될 수 있는 이론적인 뒷받침이 있는 무예 지도를 하지 않았다. 이는 세계대전 후에 미국에 의해 일본무도 수련 금지가 된 상황에서 지도수련을 하기 위해서 일본무도철학을 내세우며 종교적 색채(色彩)를 띠는 일본의 아이기도와는 다른 출발점이었다.
따라서 해방직후에 반일감정이 충만해 있던 사회적 분위기에서 일본의 대동류유술을 영세한 도장에서 지도한 최용술의 합기도 수련의 시작은 주변적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최용술의 까다로운 개인 지도식 낱기술 지도방식에서는 뛰어난 기술에 비해 무예철학이나 사상적으로 이론적으로 무장이 되어 있지 않았기에 제자들이 최용술에 대한 존경심과 경외심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연유로 제자들이 나중에 독립해서 교육적 목적이 아닌 경제적 목적으로 도장을 차리고 운영하면서 경제적인 마찰로 인해서 갈등과 반목이 생겼을 때 최용술이 스승으로서 구심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 이유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합기도는 형성기부터 분열의 양상을 띠기 시작했고, 세력을 넓혀가면서 갈등과 함께 단체들의 분열은 심화되어갔다. 따라서 최용술이 그 당시에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민족의 지도자 계열이나 사회의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면 합기도는 분명히 바람직한 방향으로 형성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는 역사적 아쉬움이 남는다.
합기도 역사적 정립의 올바른 방향 제시(5)
합기도의 연대기별 근대사 구분 및 분석 비판: 합기도의 발전기(1970년-1989년) 이호철 박사
(2) 합기도의 발전기(1970년대에서 1980년대 후반)
1) 비정상적 합기도 발전과 흐름: 합기도단체들의 난립과 신생무예들의 출현
1970년대와 1980년대는 이소룡, 성룡, 이연걸 등의 무예영화인들로 인해 액션영화의 인기에 힘입어 동양무예에 대한 관심이 전 세계적으로 고조(高調)되었다. 이러한 동양무예의 세계적인 인기에는 태권도와 합기도의 한국무예(韓國武藝)의 기술이 큰 역할을 하였다. 이소룡의 화려한 발차기는 미국의 이준구 사범으로부터 태권도식 발차기를 배운 것이 발판이 되었다. 이소룡의 상대역으로 나온 지한재와 성룡의 상대역으로 나온 황인식은 모두 합기도 사범들이었다. 특히 성룡은 합기도 술기의 매력에 빠져 초단(初段)을 받을 정도로 합기도를 좋아했다고 그의 자서전식 회고록에서 밝히고 있다.
이러한 서양세계에서는 동양무예를 배우려는 열광적인 분위기 속에서 동양무예의 세계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한국 또한 중국액션 영화의 인기와 더불어 중국무예가 국내에 본격적으로 유입되며 번성하였다. 특히 1980년대에는 정부의 문화진흥정책에 의해 스포츠 문화의 확산과 전통문화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한층 고조되면서 무예 대중화의 서막(序幕)이 열렸다.
이러한 무예의 대중화와 인기의 시대적 상황에 힘입어 도장(관) 주도로 시작한 합기도는 지속적인 양적인 팽창을 도모하면서 사회단체 설립 또는 사단법인이나 재단법인 형태로 전환되어갔다. 가령 (통합) 대한민국합기도협회가 1973년 10월 3일에는 문교부등록 51호로 등록되면서 지한재가 1980년에 부회장에서 회장으로 부임했다. 1983년 법인감독기관을 문교부에서 체육부로 이관했다. 1987년 11월 28일에는 대한기도회 산하에 ‘무림회’를 창설하게 된다. 이후 정식으로 정부에 등록하게 되었으나, 당시 지도자들의 이해관계에 의해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1970년대와 80년대에 합기도 통합을 위한 시도가 이루어졌으나 안타깝게도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이유 등으로 모두 무산(霧散)되었다. 70년대에는 대우그룹의 총수였던 김우중 회장이 합기도의 매력에 빠져 대우빌딩 본사 안에 대형 도장을 설치하고 적극적인 후원자가 되면서 합기도의 통합을 위한 전초(前哨)를 마련하였다. 하지만 합기도 지도자들의 경영 관리 부실과 경제적 이익만 추구하는 바람에 중지되었다.
80년대의 두 번째 통합 시도는 5공화국 시기인 1985년에 전두환 대통령의 동생인 전경환이 새마을중앙합기도협회로 창립하면서 합기도단체들의 통합을 시도했지만 잠시 동안만 유지되었다. 더불어 전경환의 정치적 세력이 약화되면서 합기도는 기존의 대한기도회와 대한합기도협회, 국제연맹합기회 이외에 더 많은 단체로 분열, 양산되어 갔다.
이러한 주요 3개의 단체 중의 하나인 대한기도회 소속이었던 서인혁이 부산 지방을 중심으로 국술원을 발족시키고 ‘국술’이라는 무예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명칭에서의 분란도 더 가세(加勢)되었다. 하지만 국술원은 기존의 관절기 이외에 형(形)의 개발 등 새로운 기술들을 개발하여 합기도의 술기들을 체계화하는 역할도 하였다. 이러한 다양화된 합기도 기술들로 재무장한 서인혁은 1974년에 도미(渡美)하여 1975년에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세계국술협회를 조직 산하에 두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지역에 국술원을 통한 합기도의 우수성을 알리면서 합기도의 국제화에 공헌을 했다.
그런데 합기도를 수련했던 사범들이 화랑도, 특공무술, 경호무술 등의 신생무예들을 만들고 합기도에서 벗어난 독자적인 계열임을 주장하고 나서면서 무예의 명칭과 관련된 문제와 합기도와의 관계설정에서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였다. 또한 합기도 단체들의 난립과 더불어 합기도 체계성의 정립도 이뤄지기 전에 더 혼란만 가중되는 부정적인 현상들이 나타났다.
이러한 신생무예들이 기술적인 측면에서 합기도와의 완전한 차별성과 독자성을 가진 독립적인 무예로 인정을 받지 못한 주된 이유는 신생무예 창시자 대부분이 합기도인 출신들이었고, 신생무예 창시 의도(意圖)가 창시자의 명예욕(名譽慾)과 경제적 부(富)를 목적으로 하는 문제점 등의 한계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는 합기도는 스포츠무예로서가 아니라 다양한 호신술 덕분으로 대중적 인기에 힘입어 괄목할만한 양적인 성장을 보여주었다. 특히 도장(관)이 아닌 각 협회(대한기도회, 대한합기도협회. 국제연맹)에 따른 합기도의 술기들의 수련체계의 틀이 만들어져 가는 바람직한 현상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 후에 계속적으로 난립한 합기도의 신생단체들로 인해서 합기도 술기들이 너무 다양화됨으로써 기술적 체계성 정립의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하지만 일선 도장의 수는 급격히 증가하였고, 더욱이 대통령 경호실뿐만 아니라 경찰학교와 군대 등 공공기관에도 합기도가 정식적으로 채택되면서 명실상부한 대표적인 한국무예로써의 위치를 점유(占有)하였다.
이러한 국내에서의 인기는 해외로까지 뻗어가면서 미국과 유럽지역에서 우수한 사범들에 의해서 이전의 일본의 주짓수나 아이기도와는 다른 화려한 발차기와 다양한 실용적 호신술 덕분에 태권도가 1988년 정식 올림픽 종목이 되기까지 합기도의 국내의 양적 팽창과 더불어 해외에서도 국제화가 가속화되었다.
▲ 이호철 박사 무예신문 기사입력 2015/08/09 [00:16]
합기도의 광복이후 지난 70년 동안의 근대사는 한 인간의 흥망성쇠의 과정과 같이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 왔다.
태권도가 한국의 대표무예로 정착될 때까지는, ‘코리아 가라데’의 오명을 벗는데 각고(刻苦)의 노력과 시간이 걸렸던 것처럼, 합기도 또한 단체난립과 기술체계의 미정립 및 무명(武名) 논란 등의 부정적인 문제점들이 생겨났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단 한번도 ‘코리아 아이기도’라는 무명을 국내외적으로 사용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왜색(倭色) 무예로서의 콤플렉스에 시달리지도 않았다.
차별화된 훌륭한 합기도의 한국적인 호신 술기들이 발달되고 진화해 오면서 명실상부한 한국의 신체문화가 녹아 있는 근대무예로서 국내외적으로 발전되어 왔던 긍정적인 합기도의 흐름을 우리는 간과(看過)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합기도 무명의 개명(改名)의 불필요성에 대한 당위성(當爲性)을 논리적으로 전개해 나가기 전에, 더 설득력 있고 실증적인 주장을 위해 필자가 절실히 깨달은 것은 해방 이후에 합기도가 어떻게 형성되고 발전해 왔는가에 대한 역사적인 설명의 필요성이다.
합기도의 수련경험의 유무를 떠나 합기도의 올바른 역사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독자들을 위하여 합기도의 연대기별에 의한 근대사적 사실들을 알리고 분석적인 비판과 함께 병행되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이러한 취지에서 합기도 근대사를 연대기별로 나누어서 설명하고자 한다.
1945년 이후 현대 한국합기도의 역사 구분은 60년대 말까지를 합기도의 형성기, 70년대부터 90년대 초까지를 합기도의 발전기, 1990년대부터 2009년까지는 합기도의 확장기, 그리고 2010년 이후부터는 합기도의 정체기로 필자는 구분하고자 한다.
이러한 합기도의 연대기적인 근대 역사의 구분이 향후 후학들이 합기도의 역사를 재정립을 위해 근대역사의 기틀을 만들어가는 작업에 미미(微微)하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1) 합기도의 형성기(1945-1969)
1) 일본식 근대무예의 한국 유입과정
한국에 근대식 무예의 도입은 근대화 초기시기인 개화기에 시작되었다. 일본은 구한말기에 조선에 현대식 군대와 경찰 시스템을 보급한다는 명목 하에서 일본식 격검(검도)과 유술이 유입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무도관이 설립되고 군사훈련용 무도교육이 실시되면서 경기화도 이루어지면서 무도단체가 결성되었다. 공수도, 유도, 검도 등과 같은 근대식 일본무도의 도입은 자발적으로 필요성에 의한 국가간의 교류(交流)가 아닌 일방적(一方的)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일본 정부에 의해서 반강제적인 과정은 일본 무도 문화가 우수하다는 명분으로 한국 침략을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었던 시대적 상황이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런데 그 후에 이러한 근대식 일본무도들이 일본에 유학을 갔던 한국 학생들에 의해서도 한국에 유입되기 시작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일본무도의 한국 유입이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를 위한 강제식 유입과 함께 일본유학생들에 의해서도 자발적으로 유입되었다는 점이다.
한일합방 후에 귀국한 일본 유학생들은 한국사회의 신지식인으로 개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유학시절에 그들이 수련한 일본식 유술 및 검술, 공수도, 당수도 등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일본유학생들의 긍정적인 역할은 부분적으로나마 국력 신장과 국권수호를 위해서 교육기관에 유술 및 검술과를 설치하여 교육을 실시하는 노력을 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친일의식으로 무장된 일부의 일본유학생들에 의해서 일제교육의 일환으로 사용되어지는 면도 적지 않았다. 하여튼 사회적으로 일본무도에 관심이 확대되면서 일반인들도 일본식 근대무도를 대중적으로 수련하기 시작했다.
광복초기에는 일제시대의 일본식 무도종목들이 여전히 학교 및 군대에서 경찰교육을 위한 무예로 장려되었다. 특히 대한체육회의 조직이 결성되기 시작하면서, 무예단체는 대한체육회의 산하단체로 가맹되었고, 무예의 스포츠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합기도의 역사적 정체성이 일본무도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이유는, 해방 직후에 일본무도의 문화가 합기도 발전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일본 문화가 강제적으로 주입되었던 시기로부터 한국 무예가 어떤 것이든 일본적인 색깔을 금방 벗었을 수 없는 상황적인 불가피성이 있었다.
이는 향후 합기도가 일본 아이기도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잘못된 인식을 만연(蔓延)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어서, 특히 체육계 지도자들이나 무예를 연구하는 학자들조차 합기도의 원형은 일본 아이기도라고 하는 어처구니없는 주장들이 난무(亂舞)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탈일본화를 위한 한국의 무예의 정립을 위한 본격적인 노력을 위한 움직임이 일어나기도 전에 6·25의 한국내전으로 인해서 혼란한 한국 사회에서 자체적인 무예문화의 정립의 기회를 상실하는 아픔을 겪었다. 전란(戰亂) 후에는 무예단체의 융합(融合)과 분화(分化)가 반복되는 과정을 겪었다.
가령 일본무도의 정체성이 확실한 유도나 검도와는 달리 태권도는 기존의 당수도와 일본의 공수도가 결합된 태수도에서 태권도로 통합되는 과정을 겪었고, 합기도는 대한기도회 등을 시작으로 다양한 합기도단체가 생겨나가 시작했다.
무예문화의 교류의 핵심은 무예경기가 스포츠를 지향함에 따라 그 기속화가 이루어졌다. 국내는 대한체육회가 주관하는 전국체육대회의 종목으로 채택되어 무예가 한국 사회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개화기에 일본의 근대식 무도의 위로부터 아래로부터의 도입방식은 시작부터가 잘못되었다. 무예인들간의 상호교류의 성격을 지닌 민간교류에 의한 전통무예의 조화 및 동화로써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일본 제국주의적 통치의 야심에 의한 반강제적 군사교육목적으로 또는 친일의식을 지닌 유학생들에 의한 일본의 근대무도의 유입은 특히 한일합방 후 일제 식민지시기를 거치면서 바람직한 한국식 근대무예의 형성과 토착화(土着化)는 불가능해졌다.
가라데, 유도, 검도와 같은 일본 근대식 무도가 무차별적으로 수용돼 식민지교육의 일환으로 사용되어지는 중 갑작스럽게 타의에 의해 광복을 맞은 상황에서, 합기도 또한 일본에서 대동합기유술을 수련한 최용술과 장인목 등에 의해서 도장에서 시작되었기에 국가적인 정책이나 방향의 도움 없이는 일본무도의 색깔에서 탈피한 한국식 무예로서의 합기도는 한계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2) 합기도는 최용술의 제자들에 의해서 관(도장)에서 협회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해 가다
합기도의 근대무예로서의 형성은 최용술에 의해 시작되었음을 전제로 시작한다. 일본에서 대동류유술을 수련한 최용술은 광복 후 1946년에 귀국하여 대구에서 서복섭과 1951년도에 처음으로 대한합기유권술 도장을 개관했다. 영남대 법학도였던 서복섭이 최용술의 첫 제자로 1959년에 최용술로부터 독립하여 서울 낙원동에 도장을 운영하면서 체육과 대학교수로도 후진 양성을 하는 역할을 했다.
그 후에 최용술의 제자인 지한재는 1955년 경북안동에 합기도장을 열었고(합기도 명칭 최초 사용), 2년 후인 1957년에 서울에 성무관을 창관했다. 이 시기에는 최용술은 합기도란 용어를 쓰지 않고 야와라, 유술, 합기술 등의 명칭을 혼용하여 사용했다. 기술 또한 적은 움직임의 동작에 의한 회전법과 직선법을 사용하는 관절기 위주의 실전적 술기 위주로 수련하였다.
지한재는 일본유술 지향적인 합기도를 한국식 합기도로 탈바꿈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특히 유술적 특성이 강한 합기도에 족술(발차기)을 접목시켰다. 따라서 1960년대부터는 발차기, 낙법, 각종 세분화된 종류의 술기들이 수련되어지는 모습을 갖추면서 기존의 일본식 무도와는 차별화되어 가는 모습을 띠기 시작한 동시에 합기도의 기본 수련체계인 낙법, 발차기, 술기의 수련구분이 형성되었다.
▲ 한국 합기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최용술과 지한재. 일본에서 대동류유술을 수련한 최용술은 광복 후 1946년에 귀국하여 대구에서 서복섭과 1951년도에 처음으로 대한합기유권술 도장을 개관했다. 최용술의 제자인 지한재는 1955년 경북안동에 합기도장을 열었고(합기도 명칭 최초 사용), 2년 후인 1957년에 서울에 성무관을 창관했다. ? 한국무예신문
‘합기도’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지한재가 1955년 안동에서 도장을 열면서부터였고,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1957년 서울에 창관한 성무관 이후부터였다. 이는 최용술의 첫 제자인 서복섭이 대동류합기권유술에서 ‘유권술(柔拳術)’이라고 명칭을 제정했다가 다시 ‘합기유권술(合氣柔拳術)’로 바꾸어 사용하는 것에 착안해서 지한재가 합기도로 명명(命名)하였다고 회고록에서 언급하고 있다. 이는 대동류유술을 배운 우에시바 모리헤이가 대동류합기유술에서 아이기도라는 무명이 만들어졌던 것과 같은 맥락으로 ‘합기도’가 ‘아이기도’의 이름을 차용하였다는 사실과는 전혀 무관(無關)함을 알 수 있다.
1961년 대한민국합기도협회가 처음으로 창단되었다. 그 산하로 1961년 8월 10일 김무홍에 의해 신무관이 개관됐다. 도장수가 늘어나면서 난립되어가는 합기도 계열들을 통합하고자 최용술을 중심으로 서복섭, 김정윤, 지한재 등이 1963년에 최초로 문교부에 인가를 받아 사단법인 대한기도회가 창립되었다.
그러나 통합의 노력이 서로의 이해관계로 무산되고, 1968년 4월에 지한재를 총관장으로 하는 대한합기도협회가 결성됐었고, 1968년 5월에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이는 국가적 차원에서 합기도의 통합의 필요성을 모색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 시기에 합기도라는 용어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던 최용술도 합기도라는 명칭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하지만 결국 합기도의 통합시도는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오히려 또 하나의 합기도 단체가 인천지역을 중심으로 명재남에 의해서 국제연맹합기회(재남무술원)가 창설되어 더 분열의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3) 형성기의 문제점들과 아쉬운 점들
한 무예의 초기의 지도방식과 수련체계는 그 무예의 전승과 발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가령 유도나 가라데와 같은 일본무도의 초기의 도장의 대부분 수련방식은 한 명의 사범이 다수의 수련생들을 대상으로 직접교수법에 따라 사범의 시범을 모방(模倣)하고 반복(反復)하는 상대방과의 공방형식으로 수련하는 것이었다. 일본의 아이기도도 예외 없이 이러한 도장문화의 수련이 행하여졌다.
그런데 합기도의 초기 수련은 최용술은 영세한 좁은 도장에서 소수의 제자들을 상대로 개인 지도식 술기 전수방식으로 학생들의 특성이나 상황에 따라 지도하였기에 통일된 시스템에 따른 도장문화 수련방식이 아니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용술의 합기도 기술지도에 체계가 없었다는 사실은, 그의 제자였던 유병돈의 진술(陳述)에서 잘 나타난다.
“최용술 선생님은 체계를 갖추고 지도를 하실 수 있는 분은 아니었고, 기분이 내키는 대로 그 때 그 때 기술을 가르치신 것으로 보아 도장문화의 수련을 하시지는 않으셨던 것 같다.”
이는 곧 제자들마다 공통적이 아닌 다른 낱술기들을 지도하였고, 타 무도와 같이 수준에 따라서 수련해야하는 통일된 형(품세)이 부재했다는 것이다. 향후 이는 합기도의 통일된 술기체계를 갖지 못하는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최용술의 제자들 특성에 따른 지도방식은 제자들의 합기도 기량(技倆)의 향상에 큰 역할을 하였지만, 독립한 제자들이 도장을 차려 지도할 때에는 도장마다 술기 수련의 형태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통일된 술기체계에 따른 심사제도가 없었기에 사범의 임의 판단에 의해서 급이나 단을 주는 개별적인 형태는 도장의 수(數)와 수련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문제가 되었다. 그에 따라 심사의 통합성과 규칙을 제정하기 위한 협회가 창립되어져 갔지만, 통합된 하나의 협회가 아닌 수련스타일과 기술체계가 상이한 도장들로 이루어진 협회들도 난립하게 되고 말았다.
경기화된 무예는 규정된 경기 규칙에 맞추어 훈련하기에 경기시합에서 쓰일 수 있는 기술들 중심으로 수련체계가 이루어지는 이유로 기술들의 통합이나 정리가 자연스럽게 되어간다. 오늘날 스포츠무예가 된 태권도, 유도, 검도 등은 경기화를 통해 기술적인 통합이나 체계가 이루어진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합기도는 경기화 되지 않고 전통적인 수련방식에 의존(依存)하였다. 일정한 기준이나 규칙에 따른 통합된 기술체계가 없다는 의미는 임의적인 호신술기들이 검증 없이 우후죽순처럼 만들어지고 수련되면서 합기도의 술기가 무려 3,000여 수(手)를 넘는 양적인 팽창을 초래하였다.
이는 곧 실용적이고 효율적인 술기들의 수련의 효과가 상쇄(相殺)되는, 질적 하락의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였다. 특히 시합이나 경기화하지 않고 전통적인 수련방식을 고수(固守)한다는 명분(名分)하에 이러한 통합성과 체계성이 부족한 합기도 술기에 대한 고질적인 문제의 발단이 합기도의 형성기부터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다.
최용술이 합기도를 보급하던 시기에 태권도의 최홍희 장군처럼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위치 즉 군인장교나 민족지도자 또는 교육자의 직위에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도 든다.
가령 최홍희는 회고록에서 태권도란 무명으로 통일하는 과정에서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공수, 당수는 일본말로 가라데인데, 이 좌석에서 가라데를 고집해야 할 사람은 바로 나요. 나는 일제 시대 가라데를 배웠으며 (…) 우리가 해방되었고 또 우리 민족무도를 만들자는 뜻에서 가라데를 버리자는 것인데 해방 후에 배운 당신들이 무엇 때문에 가라데를 고집하는 거요?라고 언성을 높이며 강력히 주장한 것에 대해 모두들 아무 반박도 못하고 “그러면 태권도로 합시다” 하고 동의했다는 사실이나 자신이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이 되고, ‘태권도’가 협회 명칭으로 된 것은 그 당시에 도장(관) 관장들은 그의 육군 소장이라는 권위가 있었기에 순순히 응했다”고 술회(述懷)하고 있다.
비록 최용술이 뛰어난 합기도 술기와 카리스마적인 지도스타일로 근대합기도를 형성한 우수한 제자들을 많이 양성하였지만, 개인적인 도장에서의 사제관계로 끝나고 세력이 커 갈수록 그들을 한 곳으로 모으고 지도할 수 있는 경제적 또는 사회적 위치가 미미(微微)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유도를 일본의 국기화 시킨 가노지고로는 동경대학의 교수였으며, 태권도도 최홍희의 군대의 장군급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기에 한국의 국기(國技)로 탄생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절감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강력한 통치력을 지닌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한 이유는, 최용술이 해방 직전까지는 독립운동을 했던 민족투사나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지도자의 위치가 아니었고, 일본에 거주하면서 일본무도를 배웠다는 그 당시로는 취약점이 있는 한계성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최용술은 제자들에게 합기도 술기를 가르치는데 열중하였으나, 지도하는 무예에 대한 철학이나 사상과 같은 이론적인 지도, 특히 한국무예로서의 기틀이 될 수 있는 이론적인 뒷받침이 있는 무예 지도를 하지 않았다. 이는 세계대전 후에 미국에 의해 일본무도 수련 금지가 된 상황에서 지도수련을 하기 위해서 일본무도철학을 내세우며 종교적 색채(色彩)를 띠는 일본의 아이기도와는 다른 출발점이었다.
따라서 해방직후에 반일감정이 충만해 있던 사회적 분위기에서 일본의 대동류유술을 영세한 도장에서 지도한 최용술의 합기도 수련의 시작은 주변적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최용술의 까다로운 개인 지도식 낱기술 지도방식에서는 뛰어난 기술에 비해 무예철학이나 사상적으로 이론적으로 무장이 되어 있지 않았기에 제자들이 최용술에 대한 존경심과 경외심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연유로 제자들이 나중에 독립해서 교육적 목적이 아닌 경제적 목적으로 도장을 차리고 운영하면서 경제적인 마찰로 인해서 갈등과 반목이 생겼을 때 최용술이 스승으로서 구심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 이유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합기도는 형성기부터 분열의 양상을 띠기 시작했고, 세력을 넓혀가면서 갈등과 함께 단체들의 분열은 심화되어갔다. 따라서 최용술이 그 당시에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민족의 지도자 계열이나 사회의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면 합기도는 분명히 바람직한 방향으로 형성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는 역사적 아쉬움이 남는다.
합기도 역사적 정립의 올바른 방향 제시(5)
합기도의 연대기별 근대사 구분 및 분석 비판: 합기도의 발전기(1970년-1989년) 이호철 박사
(2) 합기도의 발전기(1970년대에서 1980년대 후반)
1) 비정상적 합기도 발전과 흐름: 합기도단체들의 난립과 신생무예들의 출현
1970년대와 1980년대는 이소룡, 성룡, 이연걸 등의 무예영화인들로 인해 액션영화의 인기에 힘입어 동양무예에 대한 관심이 전 세계적으로 고조(高調)되었다. 이러한 동양무예의 세계적인 인기에는 태권도와 합기도의 한국무예(韓國武藝)의 기술이 큰 역할을 하였다. 이소룡의 화려한 발차기는 미국의 이준구 사범으로부터 태권도식 발차기를 배운 것이 발판이 되었다. 이소룡의 상대역으로 나온 지한재와 성룡의 상대역으로 나온 황인식은 모두 합기도 사범들이었다. 특히 성룡은 합기도 술기의 매력에 빠져 초단(初段)을 받을 정도로 합기도를 좋아했다고 그의 자서전식 회고록에서 밝히고 있다.
이러한 서양세계에서는 동양무예를 배우려는 열광적인 분위기 속에서 동양무예의 세계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한국 또한 중국액션 영화의 인기와 더불어 중국무예가 국내에 본격적으로 유입되며 번성하였다. 특히 1980년대에는 정부의 문화진흥정책에 의해 스포츠 문화의 확산과 전통문화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한층 고조되면서 무예 대중화의 서막(序幕)이 열렸다.
이러한 무예의 대중화와 인기의 시대적 상황에 힘입어 도장(관) 주도로 시작한 합기도는 지속적인 양적인 팽창을 도모하면서 사회단체 설립 또는 사단법인이나 재단법인 형태로 전환되어갔다. 가령 (통합) 대한민국합기도협회가 1973년 10월 3일에는 문교부등록 51호로 등록되면서 지한재가 1980년에 부회장에서 회장으로 부임했다. 1983년 법인감독기관을 문교부에서 체육부로 이관했다. 1987년 11월 28일에는 대한기도회 산하에 ‘무림회’를 창설하게 된다. 이후 정식으로 정부에 등록하게 되었으나, 당시 지도자들의 이해관계에 의해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1970년대와 80년대에 합기도 통합을 위한 시도가 이루어졌으나 안타깝게도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이유 등으로 모두 무산(霧散)되었다. 70년대에는 대우그룹의 총수였던 김우중 회장이 합기도의 매력에 빠져 대우빌딩 본사 안에 대형 도장을 설치하고 적극적인 후원자가 되면서 합기도의 통합을 위한 전초(前哨)를 마련하였다. 하지만 합기도 지도자들의 경영 관리 부실과 경제적 이익만 추구하는 바람에 중지되었다.
80년대의 두 번째 통합 시도는 5공화국 시기인 1985년에 전두환 대통령의 동생인 전경환이 새마을중앙합기도협회로 창립하면서 합기도단체들의 통합을 시도했지만 잠시 동안만 유지되었다. 더불어 전경환의 정치적 세력이 약화되면서 합기도는 기존의 대한기도회와 대한합기도협회, 국제연맹합기회 이외에 더 많은 단체로 분열, 양산되어 갔다.
이러한 주요 3개의 단체 중의 하나인 대한기도회 소속이었던 서인혁이 부산 지방을 중심으로 국술원을 발족시키고 ‘국술’이라는 무예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명칭에서의 분란도 더 가세(加勢)되었다. 하지만 국술원은 기존의 관절기 이외에 형(形)의 개발 등 새로운 기술들을 개발하여 합기도의 술기들을 체계화하는 역할도 하였다. 이러한 다양화된 합기도 기술들로 재무장한 서인혁은 1974년에 도미(渡美)하여 1975년에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세계국술협회를 조직 산하에 두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지역에 국술원을 통한 합기도의 우수성을 알리면서 합기도의 국제화에 공헌을 했다.
그런데 합기도를 수련했던 사범들이 화랑도, 특공무술, 경호무술 등의 신생무예들을 만들고 합기도에서 벗어난 독자적인 계열임을 주장하고 나서면서 무예의 명칭과 관련된 문제와 합기도와의 관계설정에서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였다. 또한 합기도 단체들의 난립과 더불어 합기도 체계성의 정립도 이뤄지기 전에 더 혼란만 가중되는 부정적인 현상들이 나타났다.
이러한 신생무예들이 기술적인 측면에서 합기도와의 완전한 차별성과 독자성을 가진 독립적인 무예로 인정을 받지 못한 주된 이유는 신생무예 창시자 대부분이 합기도인 출신들이었고, 신생무예 창시 의도(意圖)가 창시자의 명예욕(名譽慾)과 경제적 부(富)를 목적으로 하는 문제점 등의 한계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는 합기도는 스포츠무예로서가 아니라 다양한 호신술 덕분으로 대중적 인기에 힘입어 괄목할만한 양적인 성장을 보여주었다. 특히 도장(관)이 아닌 각 협회(대한기도회, 대한합기도협회. 국제연맹)에 따른 합기도의 술기들의 수련체계의 틀이 만들어져 가는 바람직한 현상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 후에 계속적으로 난립한 합기도의 신생단체들로 인해서 합기도 술기들이 너무 다양화됨으로써 기술적 체계성 정립의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하지만 일선 도장의 수는 급격히 증가하였고, 더욱이 대통령 경호실뿐만 아니라 경찰학교와 군대 등 공공기관에도 합기도가 정식적으로 채택되면서 명실상부한 대표적인 한국무예로써의 위치를 점유(占有)하였다.
이러한 국내에서의 인기는 해외로까지 뻗어가면서 미국과 유럽지역에서 우수한 사범들에 의해서 이전의 일본의 주짓수나 아이기도와는 다른 화려한 발차기와 다양한 실용적 호신술 덕분에 태권도가 1988년 정식 올림픽 종목이 되기까지 합기도의 국내의 양적 팽창과 더불어 해외에서도 국제화가 가속화되었다.